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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관점에서 보는 산업혁명

LifeChallenger 2018. 9. 1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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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논쟁의 핵심은 지금 이 시기를 4차 산업혁명으로 볼것인가? 아니면 3차산업의 연장으로 볼 것인가하는 관점의 차이인것 같다. 즉, 지금의 시기를 혁명이라 부를 만큼 혁신적인가 또는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런 논쟁의 불씨가 될만큼 작금의 현실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규정지어야할까?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준비하고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든다.


여명


혁명은 사람에 의해 요구되어진다


혁명은 시대욕구의 반영이다. 즉,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혁명을 요구하는가? 바로 주체인 우리다. 따라서,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저야할 문제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래서 그 원하는 바대로 어떻게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결국, 변화속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가치관과 표현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그러하기에 인간과 관련된 어떠한 분야도 인문학을 벗어나서는 설명되어질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산업혁명을 해석해야만 한다. 


고인돌


인간의 욕구와 계급투쟁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 본능은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삶을 꿈꾼다. 그것을 우리는 풍요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대신하여 생산활동에 참여할 누군가가 필요했기에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나누는 계급이 생겨나게 된다. 하지만, 피지배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욕구불만과 지배층의 보다 나은 풍요를 위해 전쟁이 반발하며 패전국의 국민은 노예라는 또다른 하층계급을 양산하게 된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계급위주의 패러다임은 18세기에 들어서 시민혁명으로 인해 붕괴되며 인간의 노동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값을 지불해야하는 자본주의가 발생한다. 비록 자본주의로 바뀌었다고 해도 풍요로운 삶을 위한 인간의 욕구는 바뀌지 않았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라는 형식만이 바뀌었고 그 안에 직급이 있어서 여전히 계급주의적 패러다임은 존재하며 과거와 같이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여전히 사회문제로 남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사회주의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본능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오히려 집중된 권력은 봉건시대로의 회기를 함으로써 실패하게 된다.


프랑스 시민혁명



산업혁명과 패권주의


왜 우리는 산업혁명에 집중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역사는 발전된 문명이 미개문명을 흡수하는 양육강식의 방식으로 지속되어 왔다. 청동기문명이 석기문명을 지배했으며, 철기문명이 청동기문명을 지배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산업혁명은 기술의 변화이며 곧 힘이다. 18세기 1차 산업혁명에 의해 [기계화]에 성공한 영국은 면공업을 위시한 많은 분야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이런 풍요로움을 지속하기 위해서 저임금의 노동력과 새로운 시장이 필요함에 따라 식민지 지배가 자행된다. 16세기에 유럽에 의해 자행되었던 식민지 지배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19세기 들어 2차 산업혁명은 미국이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이런 유럽열강의 패권은 미국으로 이동하였으며 20세기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전역이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있는 무렵에도 미국은 끊임없는 기술투자로 3차 산업혁명인 [자동화]를 성공시키면서 현재까지 패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기술의 변화는 항상 힘의 논리로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기술력이 퇴보한다는 것은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으며 양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가 되는 것과 같다. 


지배


상상이 현실이 되다


모든 기술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욕구가 어떤 것을 원하는냐에 따라 미래의 발전상을 상상할 수 있다. 1965년 만화가 이정문씨는 24세에 35년후의 미래를 상상하였다.



결국, 지금 그의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듯 인간의 욕구는 기술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사람들이라면 이정문화백과 같이 이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먼 과거의 여성들은 세탁기를 상상해보지 않았을까? 굳이 먼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1969년 한국 최초의 세탁기가 개발되기 이전에 한국여성들은 자신들을 노동에서 해방해줄 세탁기를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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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에 영화에 등장했던 가사도우미 로봇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멀지 않은 미래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산업혁명은 노동혁신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산업혁명은 인간의 욕구가 기술로 표출화된 가장 혁신적인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곧 노동력의 감소이기도 하다. 힘든 노동을 대신할 기계가 등장하였으며 이를 1차 산업혁명이라 말하고, 기계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운반하는 노동을 절감하기 위해서 이동식 컨베이어를 만들어놓고 이를 2차 산업혁명이라 부른다. 또한, 운반된 제품을 선별, 포장하는 단계에서의 노동을 절감하기 위해 자동화를 만들어 놓고 이를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자동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력은 필수부가결의 요소이다. 이런 자동화기계조차도 관리, 통제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까지도 기계로 대처할 수는 없을까? 스스로 알아서 판단하고 처리하는 능력, 즉, 자율화가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계의 이런 욕구로 인공지능이 탄생한다. 그리고 현재 알파고가 바둑계를 장악하면서 학습인지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인공지능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이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이미 4차 산업혁명은 시작되었다. 이런 인공지능을 통해 증기기관이나 전기가 그러했듯, 많은 산업들이 발전할 것이다. 결국, 인간의 욕구대로 인간 자신을 대처할 노동력, 즉 로봇이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만 하는 것


산업혁명은 노동을 대체하는 것을 기반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노동을 대처한 기계로 인하여 인간이 설자리는 없어질까? 가득이나 헬조선으로까지 불리는 우리나라가 더욱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일 아닐까 하는 논란이 많다. 그럼 과거사례를 보자. 산업혁명이 발생한 18, 19, 20세기에 일자리가 없어졌나? 아니면 실업률이 많아졌나? 단순히 직업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18세기 당시 농업위주의 산업이 중공업으로 이전하면서 농업인구가 공장근로자로 바뀌었다. 19세기 경공업이 발달하면서도 마찬가지이다. 20세기 자동화가 되면서 유통서비스업으로의 직업군이 많아졌다. 따라서, 자율화에 따른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보다 새로 창출될 직업군이 많아질 것이다. 인간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이 소비의 주체이기에 기계가 생산의 주체가 되어도 이러한 대원칙은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에서처럼 지능화된 기계의 반란으로 생태계의 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지.....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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