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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리포트] 첨단기술의 해외유출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 단천연은법

LifeChallenger 2020. 12. 27.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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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픽사베이

 

 

안녕하세요. 지식창고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술이 한 나라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라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또한 진보된 기술은 시대를 변화시키는 단초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첨단기술은 자금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다른 나라들보다 진보된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나라들이 부정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겠죠. 최근 중국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한국의 고급기술인력 빼가기나 천인계획을 통한 핵심기술의 절취 등은 이를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지요. 사실, 이런 일들은 비단 오늘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사상 마지막 왕조였던 조선의 과학기술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아마 세종시대의 업적을 가장 먼저 뽑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과학기술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나를 알아보기 위해서 전세계 과학기술의 성과를 시기별, 국가별로 정리한, 1983년 발간된 일본의 "과학사기술사사전"을 보면, 세종의 재위기간인 1418년부터 1450년까지의 주요 성과에 한국은 21개, 중국은 4개, 일본은 0개, 기타 국가들은 19개로 되어 있어, 당시 세종시대에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종시대의 눈부신 과학기술의 토대는 후대에 가서도 빛을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단천연은법 또는 연은분리법이라 불리는, 납광석에서 녹는점을 이용하여 은을 축출하는 당시 최고의 은 제련기술입니다. 

 

良人金甘佛、掌隷院奴金儉同以鉛鐵錬銀以進曰: "鉛一斤, 錬得銀二錢。 鉛是我國所産, 銀可足用。其錬造之法, 於水鐵鑪鍋內, 用猛灰作圈, 片截鉛鐵塡其中, 因以破陶器, 四圍覆之, 熾炭上下以鑠之。" 傳曰: "其試之。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의 노비 김검동이, 납광석에서 은을 제련하여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는데, 납은 우리 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 매운재를 둘러 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시험해 보라." 하였다. - 연산군일기 49권, 연산 9년(1503년) 5월 18일 계미 3조

 

1503년 당시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건동은 연산군 앞에서 납광석에서 은을 제련하는 단천연은법을 시현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납광석을 며칠동안 가열한 후 남은 재에서 순수 은을 채취하던 방식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마저도 낮은 생산성을 가졌기에, 조선시대의 단천연은법은 획기적인 첨단기술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같은 시기, 전세계 은생산량 1위였던 스페인이,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에서 사용했던 수은 아말감 제련법이 한달이라는 오랜 시간과 수은중독이라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금속의 녹는점을 활용해 은을 축출하는 단천연은법이 얼마나 뛰어난 기술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고급제련기술은 주변 국가의 좋은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이런 고급기술의 해외유출을 철저하게 방지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단천연은법이라는 당시 최고의 은제련기술은 그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1506년 연산군의 폐위와 더불어 중종반정이후 발생된 사회혼란으로 다른 것을 살펴볼 여력이 없는 당시 실정과 이런 혼란기를 틈탄 지방의 부패한 관리들로 인해 아쉽게도 이 기술은 일본으로 유출되게 됩니다. 

 

但倭人交通, 多貿鉛鐵, 吹鍊作銀, 使倭人傳習其術事, 以臺諫所啓推鞫。緖宗雖武班之人, 官至判官, 不爲無識, 且吹鍊作銀, 不可人人爲之, 必有匠人, 然後乃可爲也。其家中有匠人與否, 未可知也。
다만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려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이 있은 후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 중종실록 91권, 중종 34년(1539년) 8월 19일 계미 1조

 

이 사건은 지방관인 유서종이 왜인과 내통하여 연철(납광석)을 밀수하여 은을 만들고, 그 방법까지 전수하였다는 내용이며, 이외에도 조선중기의 학자 어숙종의 패관잡기 1권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倭人。舊不知用鉛造銀之法。只持鉛鐵以來。中廟末年。有市人。挾銀匠潛往倭奴泊船地方。敎以其法。自此倭人之來。多費銀兩。京中銀價頓低。一兩之價。只惡布三四疋而已。
왜인이 옛날에는 납을 가지고 은(은)을 만드는 법을 몰라 납쇠[연철]만을 가지고 왔었다. 중종 말년에 한 상인이 은장이[은장]를 데리고 몰래 왜인의 배가 머물러 있는 지방으로 가서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로부터 왜인이 올 때에는 은냥(은량)을 많이 가지고 왔으므로 서울의 은 값이 갑자기 떨어져 한 냥의 값이 나쁜 베 3ㆍ4필 값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패관잡기 1권 

 

결국 조선의 단천연은법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은 중종시기의 혼란을 틈타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치 이를 뒷받침하듯 일본의 대규모 은광이었던 이와미 은광의 기록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광석에서 은을 분리하는 "회취법"은 1533년에 하카타의 거상 가미야 주테이(神屋寿禎)가 한반도에서 초청한 경수(慶寿)와 종단(宗丹)이라는 기술자에 의해 일본 내에서는 처음으로 이와미긴잔 은광에 도입되었다. 이 기법을 통해 은정련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그후 이쿠노(生野) 은광과 사도(佐渡) 은광 등 전국 광산에 보급되었다. - 이와미긴잔 유적 및 문화경관

 

이때부터 일본의 은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세계 은생산의 1/3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산된 은은 전국시대에 치열하게 경쟁하던 일본 다이묘들의 군자금으로, 당시 교역하던 포르투갈을 통해 조총을 사들이는데 사용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전국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되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어떻게 시대에 영향을 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진보된 선진문물의 파급력을 경험한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은 다시 한번 조선의 기술에 대한 야욕을 부리며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입니다. 이 전란을 통해 수많은 조선의 기술자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당시 한국의 얼이 담긴 유구한 도자기 기술이 무력에 의해 일본에 전파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기술강국을 넘어 문화강국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다시는 지지 않는 당당한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지금까지 지식창고였습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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