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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본문
한반도의 인구는 통계청의 2017년을 기점으로 남한 5136만명, 북한 2501만명으로 합계 7637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2017년 국가별 인구순위로 살펴보면 19위인 8212만명의 독일 다음인 20위에 랭킹됩니다. 작은 면적에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이렇게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걸까요? 아니 옛날에 한반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대 한반도의 인구에 대해서는 정확한 사료가 없으며 이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인구조사의 부정확성 (전쟁, 질병,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누락, 이주)
둘째, 가구단위인 호(戶)로 표기되었기에 대가족중심의 사회에서는 호당 평균인구수를 가늠하기 어려움.
셋째, 인구조사방법에 있어 일정한 편성원칙을 따라 작성하는 인위적인 편호방식이기에 실제와 차이가 큼
따라서, 여기에서의 고대 인구수는 다른 곳의 인구수와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시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고조선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삼국유사의 [기이(紀異)] 제1편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기 원해 천부인 3개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칭한다", "당고(요임금) 즉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여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라고 하여 기원전 2333년에 시작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원전 4세기 연나라와 대등할 정도로 성장하다 기원전 3세기 연의 침공으로 광활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축소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195년 연나라 위만이 망명하여 왕위를 찬탈하니 이를 구분하기 위해 이전의 조선을 단군조선이라 칭하고 기원전 108년 한의 무제에게 멸망당하기까지를 위만조선이라 부릅니다. 중국인인 위만이 왕위를 찬탈하면서 기존세력인 고조선인은 주변으로 이동하면서 당시 부족연맹체를 규합하여 초기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한사군(漢四郡)(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서군)설치하였지만 나중에 현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3군이 기원전 75년에 낙랑군에 편입됨으로써 위만조선은 낙랑군만 남게 됩니다. 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이 생겨나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군과 현도군을 위협하니 유민들이 삼한으로 이동하면서 유민을 막고자 낙랑군의 남방에 대방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중국 후한의 역사가인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지리지]에 나와있는 한사군을 내용을 보면
낙랑군(樂浪郡)에 대해 "25개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구수는 62,812호이며 인구수는 406,748명이다" (6.47명/호)
요동군(遼東郡)에 대해 "18개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구수는 55,972호이며 인구수는 272,539명이다" (4.86명/호)
현도군(玄菟郡)에 대해 "3개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구수는 45,006호이며 인구수는 221,815명이다" (4.92명/호)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때 위만조선이 통치하던 지역에는 163,790호와 901,102명의 인구(호당 평균인구수 5.5명/호)가 존재한 것으로 보여지집니다.
고조선의 멸망후 고조선은 여러나라로 분리하게 되어집니다.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자리잡았으며 고구려는 고조선의 북쪽, 요동에서 동쪽 천리에 위치하였고 고구려의 남쪽에는 동옥저가 자리하였으며 옥저남방에는 예가 자리하였고 삼한이라는 부족연맹체가 고조선의 남방에 있었다고 보면 삼한의 인구수도 한반도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관련내용은 중국 서진의 진수가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서의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서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여(夫餘)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挹婁)와,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있으며 면적은 2천리요, 호수는 8만호이다."
"고구려(高句麗)는 요동의 동쪽 천리밖에 있으며 남쪽은 조선(朝鮮),예맥(濊貊)과 동쪽은 옥저(沃沮)와 북쪽은 부여(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면적은 사방 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호이다."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북쪽은 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4천호이다."
"예(濊)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와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며 호수는 2만호이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삼고 남쪽은 왜와 접경하니 사방면적이 4천리 쯤 된다. 한에는 세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위치하며 48국(國)이 있고 총 10여만호가 있고,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며 12국(國)으로 되어 있으며 변한(弁韓)은 변진(弁辰)이라고 하며 총 12국(國)으로 되어 있어서 진한과 변한의 합계가 24국(國)이나 되며 총 4~5만호가 있다"
삼국지 위서의 동이전에는 조선(고조선)의 명칭이 나오나 당시의 조선을 동이전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중국의 부속국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향후 낙랑군과 대방군이 314년에 멸망하니 이를 포함시킨다면 고조선 말기의 한반도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은 최대 총 28만호(+낙랑군의 6만호)가 있었으며 대략 위만조선의 호당 평균인구수 5.5명로 계산해보면 대략 340,000호 X 5.5명 = 187만명정도가 단군조선의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국시대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뉘어진 삼국시대를 맞이합니다. 이 때는 빈번한 전쟁으로 인한 인구변화가 극심한 시기로 이 시기의 인구수를 나타내는 사료는 중국에서 945년에 편찬된 후진의 역사서인 [구당서]와 고려의 승려 일연가 1281년에 쓴 [삼국유사]가 있는데 [구당서]의 경우에는 고구려(668)와 백제(660)가 멸망했던 당시의 총 가구수가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기 인구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편차가 큰 탓에 역사가들은 구당서의 기록을 근거하여 인구수를 추정하는 방법을 씁니다. 이런 인구수의 추정치로 인하여 학자마다 고대 삼국시대의 인구수의 편차가 심합니다.
고구려 : 210,508호(697,000호-구당서) - 고조선의 호수와 비교하여 인구수(5.5명)를 추정해보면 115만명
백제 : 152,300호(760,000호-구당서) - 고조선의 호수와 비교하여 인구수(5.5명)를 추정해보면 83만명.
다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하고 부여정림사지 5층 석탑의 제 1층 탑신과 옥개받침에 새긴 당평백제국비를 보면 당시 백제는 76만호였으며 인구수는 620만에 달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이는 터무니없이 자신의 공적을 과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학계에는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를 근거로 해서 76만호라는 중국의 구당서를 내용을 옮겨 적을 수 없어 삼국유사의 인구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신라 : 178,936호(구당서에는 따로 기록되지 않음) - 고조선의 호수와 비교하여 인구수(5.5명)를 추정해보면 98만명
가야 : 75,000명 ([삼국유사]의 [가락국기]편에 기록되어 있음)
다만, 중국의 삼국시대에서 220년 위나라 조조가 실시한 가호마다 정액의 세금을 부과하는 호등제와는 달리 사람의 수에 따라 인두세를 부과하던 고대 삼국시대의 인구조사자료가 없다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삼국시대에 발생했던 빈번한 전쟁과 그 승패에 따른 포로의 이송 등으로 자료가 소실 또는 유실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대의 호(戶)는 단순한 가족의 개념이 아니며 관부에 의해 등록되어 있는 가호는 혈연가족뿐만 아니라 경제적 주종관계까지 포괄하여 편성되기에 단순히 현재의 가족개념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런 차이는 통일 신라에 이르러 가호에 따른 9등제를 실시하면서 더욱 뚜렷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인구수에 관한 부분은 당나라와 고구려이 전쟁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당의 기습공격으로 인한 개전초기와는 달리 요동성 전투에 고구려군은 4만명의 지원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지원하였고, 요동성이 함락되고 바로 백암성이 공격받자 재차 1만명의 구원군을, 안시성 부근까지 남하하자 대군 15만을 이끌고 주필산 전투에서 참여함으로써 20만명에 육박하는 군사를 동원합니다. 이런 당과의 전쟁에 필요한 지원군의 동원과 남쪽으로 신라와 백제를 경계로 대치하는 주둔군, 기존 북방의 주요성에 주둔하고 있는 방위군 등을 포함하면 고구려는 30만명이 넘는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며 비록 말갈족의 동원과 함께 국가위기상황에서 중세전쟁의 통계치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인구의 최대치인 20%에 해당하는 30만명을 동원했다고 보면 자체적으로 150만명이상의 인구수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합리적 추론입니다. 이런 고구려의 추정 인구수를 기반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백제와 신라의 호수를 역추론하면 당시 한반도에는 30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
삼국시대가 나당연합으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혼란한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이런 고려의 건국(918년)과 멸망(1392년)사이의 인구를 알아봅니다. (기존의 압록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고려의 국경선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사를 변찬하는 과정에서 굳어진 학설로 여기에서는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조선사 연구팀의 학설을 근거로 고려의 영토를 인식하고자 합니다)
고려의 인구수를 나타내는 문헌자료에는 1343년 원나라때 편찬된 중국 북송과 남송시대를의 역사를 기록한 송사(宋史)의 열전에 유일하게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고려시대의 인구를 210만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여기에서 송사의 열전을 소개하자면 경원(중국 남송의 4대 황제인 영종의 연호(1195~1200년))때의 기록으로 고려시대의 인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해석본을 보면 "통틀어 모두 3경(京), 4부(府), 8목(牧)이며, 군(郡)이 118개, 현(縣)과 진(鎭)이 390개, 섬이 3,700개이다. 작은 군읍(郡邑)은 간혹 100가(家)이다. 인구는 총 210만명으로, 병사, 백성, 僧侶가 각각 3분의 1이다." 여기에서 병사의 수로 인해 다른 이견들이 많이 나옵니다. 과연 국가의 30%에 해당하는 이들로 군사운용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려가 호족연맹체로 구성된 국가였으며 16세부터 60세까지 군역을 져야하는 군사제도(고려사 지(志)의 식화(호구조)에 따르면 民年十六爲丁, 始服國役, 六十爲老, 而免役라 하여 "백성의 나이 16세가 되면 ‘정(丁)’으로 삼아 비로소 국역(國役)에 복무하게 하며, 60세가 되면 ‘노(老)’라 하여 국역을 면제한다"라고 되어 있음)를 가지고 있음을 상기해야합니다. 고려의 군사제도에 관해서는 조선초 1451년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를 보면 백성의 신분에 관계없이 군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해석본을 보면
"고려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처음으로 6위(衛)를 설치하였는데, 위(衛)에는 38령(領)이 있고, 령(領)은 각 1,000인씩이다."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동여진(東女眞)이 불화를 일으키자, 이에 예의 주시하며 이를 방어하고자 날마다 군사를 훈련하여 마침내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였다. 산관(散官 )·이서(吏胥)로부터 상고(商賈)·천예(賤隷 천민과 노예)·승려(僧侶)에 이르기까지 예속되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은 비록 옛날 제도에 맞지 않았으나, 그러나 또한 한 때 이를 써서 효과를 거두었으니 칭찬할만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 뒤에 비로소 다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였는데, 혹은 경도(京都)에서 귀천(貴賤)을 묻지 않고 끌어 모았고, 혹은 문무산직(文武散職)·백정(白丁)·잡색(雜色)을 뽑았다. 혹은 4품 이상의 가동(家僮)을 가려 뽑았고, 혹은 가옥(家屋) 간수(間數)의 많고 적음에 차이를 두기도 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비록 위태롭지 않고자 한들 어찌되겠는가? "
조선시대
고려말인 14세기에 이르러 한해 농사를 짓고 나면 지력 회복을 위해 1~2년 땅을 놀리던 휴한농법에서 퇴비법이 발달하여 매년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법으로 전환되면서 농업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으며 이런 농업기술은 조선초기에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조선의 인구증가에도 막대한 영향으로 작용합니다. 조선시대의 인구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 아래와 같은 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태조 즉위 4년에서부터 세종 14년에 실시된 호구조사의 경우 인구를 인정(人丁)로 구분하여 만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성을 기준으로 파악되었기에 정확한 인구통계가 불가능하기에 학계에서는 1543년 중종 38년에 실시된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조선건국초기의 인구수를 파악하고 이를 통해 고려말의 인구수를 파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삼국시대이전에는 자연호를 기점으로 호구조사를 한데 비해서, 고려부터 보편화된 인위적인 편호방식(編戶方式)의 혼재로 인하여 실제보다 누락된 호구수의 신고가 비일비재하여 정확한 인구통계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중론이 됩니다.
고려말에 시작된 퇴비법을 이용한 연작상경법으로 인한 농업생산량의 증대로 조선초기의 인구가 증가되었다면 17세기후반에는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조선중기이후의 인구가 큰폭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광무 10년인 1906년 같은해 대한제국정부의 호구조사치와 경무고문부의 일본관헌에 의한 조사치간의 2배이상의 호구수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시점에서 일본관헌에 의한 조사치가 현대인구통계학에서 말하는 현재인구수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전의 호구조사와 실제인구수의 편차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1906년의 일본관헌에 의한 호구조사치를 근거로 중종 38년인 1543년의 인구가 562만명이었으며 조선건국당시인 1392년에는 397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 인구조사는 자세한 조사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 수치가 국세조사치와의 일치되는 점에서 비교적 주목할만합니다.
광복이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강점기를 벗어난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까지 극심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인구이동이 심화되어 자세한 인구조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시기입니다.
아래의 표는 남한인구만을 나타낸 것으로써 1945년 남북분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북한지역의 인구가 월남한 후 1946년 처음으로 조사된 호구치를 나타냅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안정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인구는 폭발적인 증가를 보여줍니다.
북한의 인구
북한은 그동안 인구통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다가 1989년 이르러서야 UN의 산하기구인 유엔인구기금에 1946~1987년 기간의 인구와 인구관련 사회지표 자료들을 제출하게 됩니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이후 유엔인구기금의 도움을 받아 1994년, 2008년에 걸쳐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최근 북한의 조선중앙연감(2017)은 북한의 인구를 2,503만명(2015년 기준)으로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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